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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대신 속도와 차이를 보는 과학자의 시선 『자연스럽다는 말』 이수지 박사 편 ② 본문
(①에서 이어집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설득할 때, 너무도 자주 ‘자연스럽게’라는 말을 꺼냅니다. “자연이 좋다.”, “자연스러운 관계가 편하다.”, “자연스러운 표정이 예쁘다.”....... 일상에서는 대체로 호의적인 뜻으로 쓰는 이 말이 논쟁의 장으로 들어가면 갑자기 확고한 판결문처럼 변합니다. “원래 그런 거잖아.”, “자연의 질서니까.”. “본능이니까.” 말하는 사람은 가벼운 확인처럼 던졌다고 느끼는데, 듣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아니라 ‘끝내기’가 되는 순간이 생기죠.
이수지 박사의 『자연스럽다는 말』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자연은 정말 우리 질문의 정답을 쥐고 있는가? 우리가 자연을 불러오는 방식에는 어떤 기대와 편향이 섞여 있는가? 그리고 그 말이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가? 이 질문은 일상의 말버릇에서 출발하지만, 도착지는 종종 연구 현장입니다. 이수지 박사는 2026년 4월 1일부터 막스 플랑크 인구학 연구소에서 ‘생식 노화(Reproductive Ageing)’를 주제로 한 독립 연구 그룹을 이끌며 팀을 새로 꾸립니다. 오늘 2화는 그 새 출발부터 이야기를 꺼내 보려 합니다. 연구의 언어와 책의 언어가 어디서 만나는지도 함께요.

팀을 꾸리며 배우는 것들
사이언스북스(이후 SB): 막스 플랑크 인구학 연구소에서 ‘생식 노화(Reproductive Ageing)’를 주제로 한 연구 그룹을 이끌며 2026년 4월부터 팀을 시작하신다고 들었는데요. 이 연구 그룹의 준비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생식 노화 속도가 개인과 집단에 따라 다르고, 남성의 생식 노화도 중요하다는 점을 연구하겠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고민이 『자연스럽다는 말』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이수지: 아이를 낳는 연령이 늦어지면서 난임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늘었다는 이야기는, 주변에서도 뉴스에서도 한 번쯤 접하셨을 겁니다. 연령이 높아질수록 생리적으로 임신·출산의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생물학적 사실이고요. 그런데 『자연스럽다는 말』 에서도 강조하듯 생물학적 사실이 실제로 발현되는 양상은 개체 간의 변이(variation)입니다.
쉬운 예로, 어떤 사람은 마흔이 넘어도 문제없이 임신하는데 어떤 사람은 마흔이 되기 전에도 난임 시술에 의존해야 합니다. 생식 노화의 속도와 그 양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슷하게 중년 이상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완경을 경험하는데, 완경이 찾아오는 시기와 증상의 종류와 정도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또, 생식 노화는 남녀 모두에 해당하는 현상인데, 남성의 생식 노화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덜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똑같은 생식 노화를 경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출발해, 저희 연구단은 생식 노화가 일어나는 속도와 그 양상의 차이를 기술하고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궁극적으로는 생식 노화로 인한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담입니다만, reproduction이라는 영단어가 한국어로는 재생산, 생식 혹은 번식 등 여러 단어로 번역되어 ‘생식 노화’ 라는 개념이 더 낯설게 느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연구 내용을 소개할 때는 번역어 자체보다 “우리가 말하려는 현상이 무엇인지”를 먼저 풀어 말하는 연습을 자주 하게 됩니다. 새 팀을 준비하는 과정도 사실은 그런 언어를 다듬는 과정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원래 그래.”를 늦추는 법
SB: 연구실, 학회, 동료들과의 대화에서도 “그건 원래 그래.”, “그건 자연스럽지.” 같은 식의 말버릇, 혹은 그와 비슷한 논리가 등장할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박사님께서 경험한 사례가 있다면 어떤 형태였나요? 그리고 그런 자동 반응을 견제하기 위해 학계에서 사용되는 장치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수지: 과학 정신은 “원래 그래,”라는 문장을 가장 경계합니다. 그런데 과학을 하는 우리는 결국 사람이다 보니 그 정신에 충실하기 어렵습니다. 이론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과학자 개인의 아집이나 편견은 늘 작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에는 여러 겹의 안전 장치가 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장치는 동료 심사(peer review) 제도입니다. 논문을 내면 언제나 몇 명의 익명 심사원이 방법과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 평가 내용을 충분히 반영해 논문을 다시 써야만 게재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어떤 평가를 받을지 모르고 평가가 박할 경우 논문 게재를 아예 거절당하기 때문에, 과학자라면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입니다. 물론 동료 심사라고 해서 완벽한 장치는 아닙니다. 그러나 과학자 개인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동료 과학자들의 건설적인 평가를 통해 보완한다는 기본 정신 덕분에, 거시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그건 원래 그래.” 의 형태로 존재하는 느슨한 지식을 합리적인 의심의 과정을 통해 단단한 지식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겠지요. 저는 과학이 위대해서라기보다, 과학이 인간의 한계를 전제로 설계된 제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새로 열기 위한 맺음
SB: 『자연스럽다는 말』을 편집하면서 결론을 제시하기보다 독자가 자기 생각을 점검하게 하는 책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런 책이 때로는 대화의 장을 여는 대신 ‘상대의 말을 끊어버리는 장치’처럼 호출될 위험도 있잖아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기) 박사님은 이 가능성을 어떻게 보시나요? 그리고 그런 오독을 줄이기 위해 글 속에 의식적으로 넣은 안전 장치가 있다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수지:그 가능성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의 질문이 때로는 친절한 초대가 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상대를 시험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 말이 왜 자연스럽지?”라는 질문이 대화를 열어젖히는 순간도 있지만, 상대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면 그 질문은 곧바로 대화를 닫는 신호가 되기도 합니다. 그 점에서 이 책이 누군가의 말을 끊는 장치로 사용된다면, 저는 그것이 단지 불행한 오독이라기보다 우리가 그동안 해오던 대화가 얼마나 빠른 결론과 단정에 기대어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징후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어떤 대화는 새로 시작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시간이 불가피합니다. 새로 열기 위한 맺음이 아닐까요. 또 그러기를 바랍니다.

‘자연’과 ‘-스럽다’ 사이에서
SB: 책이 나온 뒤(강연이나 인터뷰, 그믐 모임 포함해서) 독자들이 가장 자주 오해하거나 단정하는 지점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그 오해는 어떤 언어 습관(예: 원인 하나로 정리하기, ‘자연’으로 도덕 판단하기, 정상/비정상 구분하기 등)에서 비롯된다고 보시는지, 그리고 박사님이 지금 책에 한 문장을 덧붙일 수 있다면 어떤 문장을 더해 바로잡고 싶은지도 듣고 싶습니다.
이수지: 가장 자주 받는 반응 중 하나는 “이제 ‘자연스럽다’는 말을 못 쓰겠어요”라는, 농담 섞인 푸념입니다. 저는 그 말 자체를 금지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자연스럽다는 말이 언제나 문제적이라면, 우리는 이미 일상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금지가 아니라 민감해지는 법에 가깝습니다.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자연 그 자체를 사유하려 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스러움’을 갖다 대고 자연을 소비하는 일상의 언어 습관에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그 부분에서 책이 나온 뒤 깨달은 것이 있다면, “‘자연스럽다.’는 말은 결국 ‘자연’과 ‘-스럽다’의 결합이다.”라는 점입니다.
독자와 만난 뒤의 글쓰기
SB: 어느덧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예전에 진행하신 《릿터》 인터뷰에서 이번 작업이 너무 즐겁고 보람 있어서 “당분간은 다음 작업을 서둘러 떠올릴 필요가 없을 만큼” 충만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출간 이후 한국에서 독자 반응과 현장을 직접 마주하신 지금은 글쓰기와 다음 작업에 대한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거나, 혹은 여전히 (어떤 점에서) 같은지 궁금합니다. 독자 반응을 통해 “다음에는 이런 방식으로 써 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싹트셨다면 그 방향도 궁금합니다.
이수지: 다음 작업에 대한 생각은 지금도 여전히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출간 이후 독자들과 직접 만난 시간은 제게 무척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연구자로서 논문을 발표하면, 누군가가 읽을지라도 그 반응을 내 눈앞에서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글이 어떤 속도로,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망설임과 함께 읽히는지를 체감할 기회가 많지 않지요. 그런데 책은 달랐습니다. 같은 문장이 어떤 독자에게는 위로가 되고, 어떤 독자에게는 도전이 되며, 또 어떤 독자에게는 “내가 늘 쓰던 말이 갑자기 낯설어졌다”는 작은 충격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반복해서 보게 됐습니다. 저는 잡지 《고래가 그랬어》를 통해 어린이 독자들과 만났던 시간이 특히 오래 남았습니다. 어린이 독자들은 “자연스럽다.” 같은 말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다룹니다. 어떤 질문을 던지면, 그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자기 언어로 다시 만들어서 돌려 주곤 하지요. 그 대화를 겪으며, 다음 작업이 어쩌면 제 책에서 다룬 몇 가지 주제를 어린이 독자를 위해 다시 쓰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가능성의 단계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다음 작업의 형태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번 책이 제게 다음 질문을 남겼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책에 공명해 주신 독자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수지
서울 대학교 아동 가족 학과와 인류학과에서 학사를, 같은 대학교 대학원 인류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고 뉴욕 대학교(NYU)에서 생물 인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독일 막스 플랑크 인구학 연구소에서 현대 인류의 출산 및 생식 행동을 연구하고 있다. 2026년부터 막스 플랑크 인구학 연구소 생식 노화(Reproductive Ageing) 독립 연구단을 이끈다. 미국 《과학 국립원 회보》, 《영국 왕립 협회 회보》, 《진화 의학 및 공중 보건》, 《동물 생태학 저널》 등에 논문을 다수 기고했다. 저서로는 『휴먼 디자인』(공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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