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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칼 세이건 살롱> 스케치

(3강)과학은 지상 최강의 지식이다

Editor! 2016.10.26 09:11

올해, 칼 세이건 서거 20주기를 맞아 사이언스북스와 과학과 사람들이 공동으로 주최한 ‘칼 세이건 살롱 2016’의 문이 열렸습니다. 우주를 꿈꾸던 뛰어난 천문학자이며,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세계적인 과학자 칼 세이건. 앞으로 13주 동안 진행될 ‘칼 세이건 살롱 2016’은 그의 과학과 사상, 꿈을 공유하는 특별한 자리가 될 예정입니다. 

팟캐스트 <파토의 과학하고 앉아 있네> 진행자 원종우 대표가 메인 호스트로, 천문학자 이명현 박사가 서브 호스트로 참여해 매회 다양한 전문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이번 행사는 9월 30일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다큐 「코스모스: 스페이스타임 오디세이」를 한 편씩 보고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인류는 얼마나 더, 어디까지 진화할까요? ‘칼 세이건 살롱 2016’이 거듭되고 「코스모스」가 던지는 질문을 곱씹을수록 이 궁금증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칼 세이건 살롱 2016’은 이 궁금증을 풀 열쇠 몇 개를 더듬거리는 우리의 노력이 아닐까 합니다. ‘칼 세이건 살롱 2016’ 세 번째 시간은 「코스모스」의 세 번째 에피소드 ‘지식이 두려움을 정복할 때(When Knowledge Conquered Fear)’를 보고 진화학자 장대익 교수님의 강의를 듣는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10월 14일 충정로 ‘벙커1’에 모인 모두가 장대익 교수님의 과학 이야기에 몰두하고, 과학과 종교라는 인류의 오래된 숙제를 따지고, 과학이 직면한 도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다큐 시청과 강의에 앞서 원종우 대표는 ‘지식이 두려움을 정복할 때’라는 제목을 가리켜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을 극복한 게 과학사”라는 말을 했습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거리감이 생기고, 거리감은 쉽게 두려움이나 증오로 변하기도 해요. 다른 생물 또는 다른 민족에 대해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났죠. 그런 일을 계속 겪어 왔습니다.”라는 이야기였는데요. 여기서 움베르토 에코 『적을 만들다』의 한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적이 없다면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적을 만들다』, 13쪽)

 

여성, 유대인, 장애인, 성소수자 …… 차별과 증오는 무지와 두려움 그리고 어떤 필요에 의해 자행되어 왔습니다. 필요하다면 만들어 내서까지 두려움을 이용한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인류에게 있어 과학은 그 자체로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무지로 인한 두려움, 그 비합리성을 타파해 나가는 역사의 발걸음이 또한 과학이었기 때문입니다. 「코스모스」에서도 말했듯 혜성은 두려움의 징조였지요. 재앙이라는 의미의 단어 ‘disaster’의 어원은 ‘잘못된(dis) 별(astro)’, 그러니까 불길한 별을 뜻하는 그리스 어입니다. 사람들은 혜성의 출현이 재앙을 가져온다고 믿었습니다. 혜성은 곧 전쟁, 기근, 전염병이었습니다. 17세기, 에드먼드 핼리가 혜성의 비밀을 발견해 낼 때까지 그 믿음은 굳건했습니다. 17세기. 인류의 ‘지식이 두려움을 정복’한 시간은 의외로 이렇게 짧습니다.




오늘은 핼리를 기억해야 하는 밤

아이작 뉴턴과 에드먼드 핼리, 이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과학적 탐구를 다룬 「코스모스」세 번째 에피소드 시청이 끝나고 장대익 교수님은 앤 드루얀의 각본에 감탄하며 에드먼드 핼리에 집중했습니다.


“좋은 포인트를 가지고 썼다고 생각하는데요. 과학사적으로 보더라도 그래요. 보통은 뉴턴이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명확히 핼리 같아요. 뉴턴이 대단한 업적을 쌓은 과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성격도 괴팍하고, 피해 의식도 많고, 욕심도 많았고, 로버트 훅과 중력과 빛 이론에 대한 우선권 논쟁을 했잖아요. 라이프니츠와는 미적분을 누가 먼저 개발했느냐 가지고 진흙탕 싸움을 했었거든요. 사실은 과학의 리얼리티죠. 과학자들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협력과 선의의 경쟁을 한 것처럼 보이고, 물론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만, 한편에서는 누가 먼저 했느냐 누가 베꼈느냐를 가지고 엄청난 싸움을 하거든요. 그 진흙탕에서 핼리는 돋보이는 존재입니다. 그는 훅과 뉴턴을 연결시켜 주기도 하고, 우울한 삶을 살던 뉴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연구하게 만들기도 하죠. 또한 핼리 본인이 너무나 많은 연구를 했어요. 오늘은 우리가 핼리를 기억해야 하는 밤인 것 같습니다.” 


핼리를 기억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핼리 하면 떠오르는 게 바로 핼리 혜성이죠. 혜성이 지나가고 나면 꼬리 잔해가 남습니다. 그것들이 지구를 통과할 때 생기는 유성우가 오리온자리 유성우인데요. 이명현 박사님은 10월 20일, 21일에 관측되는 오리온자리 유성우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76년 주기의 핼리 혜성은 보지 못하더라도 잔해는 관찰할 수 있는 기회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보셨습니까? 못 보셨다고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오리온자리 유성우는 매년 10월 21일경 관측이 가능하다고 하니까요. 


본격적인 강연에 앞서 장대익 교수님의 과학 뒷이야기 하나 더 전합니다. 뉴턴에 관한 이야기이자 ‘동시 발견(Multiple Discovery)’의 이야기, 어쩌면 과학의 핵심이기도 할 이야기입니다.


“뉴턴의 사과 기억하시죠? 그가 캠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를 다니던 시절, 사색에 잠겨 있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기록되어 있죠. 그런데 다큐를 보면 정말 그럴까,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그 이야기는 뉴턴 자신이 한 이야기거든요. 우선권 논쟁 때문에 누가 먼저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는가를 가지고 훅과 싸웠잖아요. 그러다보니 ‘사실 내가 대학교 때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생각했다.’고 한 맥락에서 나온 말이에요. 때문에 그대로 믿을 수는 없죠. 다만 그만큼 치열했다는 의미고요. 

한편으로는 그 당시 대다수의 뛰어난 과학자들이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과학에 ‘동시 발견’이라는 게 있습니다. 진화를 이야기한다면 찰스 다윈과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가 등장해야 해요.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당시의 뛰어난 과학자들이 모두 그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비슷한 대답들이 나왔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과학이 천재들의 향연이기도 하지만 집단적인 작업이기도 하다는 의미입니다.”


집단적 작업으로써의 과학에서 장대익 교수님의 강연이 바로 이어집니다. 혁명적 사상으로서의 과학과 종교로부터 ‘분가’하게 된 과학의 역사적인 흐름을 살펴보고, 우리가 어떻게 과학을 즐길 수 있는지 고민해 보는 멋진 과학 강연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과학은 어떻게 종교를 ‘이겼는가?’ ① 호기심에 대한 호기심

“핼리 혜성의 주기가 76년이죠.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핼리에게 있던 것은 ‘books and his mind’라는 표현이 다큐에 나옵니다. 책과 그의 지성, 저는 그 부분이 이번 에피소드에서 제일 감동적이었어요. 굉장히 집요하게 그것을 알고 싶어 했던 거죠. 그러면서 그동안 사람들이 어떤 기록들을 남겼는가를 봤잖아요. 이것이 과학의 작업입니다. 공동의 작업이고, 때문에 위대한 작업이기도 한데요.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다름 아닌 ‘호기심’일 겁니다. 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과학 지식을 체계적으로 쌓아 올린 인류는 비로소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거대한 서사시”를 이야기하겠다는 장대익 교수님은 강연의 부제 「과학은 어떻게 종교를 ‘이겼는가?’」에 대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이겼는가?’에 따옴표가 있죠. 정말 이긴 건 아니에요. 아직 이겼다고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어요. 경쟁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고요. 무지에 대한 두려움, 그것을 이성적 활동을 통해 알아내려는 시도 없이 누군가의 이야기, 기록을 그대로 믿는 것 또는 그런 태도를 종교라고 한다면 과학은 그것을 뚫고 우리를 이 자리까지 오게 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조금 도발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진화학자 장대익 교수님은 호기심이 무엇인지를 진화학적 관점에서 먼저 생각해 보고자 했습니다. 처음 등장한 것은 아기 침팬지와 인간 아기입니다.


“이 침팬지는 제가 교토 대학교에 있을 때 연구했던 ‘아이모’라는 침팬지예요. 지금은 열 살이 넘었는데요. 이 침팬지가 한 살 때 할 수 있던 일은 거짓말을 조금 보태 나무를 날아다니는 정도였어요.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했고, 똘똘했어요. 그런데 인간 아기의 한 살을 생각해 보면 말이죠. 거의 한 일이 없어요. 목을 겨우 가누고, 설 정도죠. 가장 가까운 영장류인데 인간과 침팬지는 유아기가 너무 달라요. 침팬지가 더 이상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라 한다면 인간은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거죠. 저는 여기서부터 호기심이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강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던 이유를 호모 사피엔스 생활사의 독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게 장대익 교수님의 이야기였습니다. 보호자가 없으면 즉시 생존이 위태로울 수 있는 “심히 무기력한” 유아기를 보내는 인간. 이 인간은 도대체 어떤 생활사의 독특성이 있었다는 걸까요? 힌트는 ‘직립 보행’입니다.


“우리가 직립을 하면서 아이를 낳는 산도(産道)가 좁아졌거든요. 때문에 뱃속에서 태아를 조금만 키운 다음 내보낼 수밖에 없었어요. 너무나 유약하죠. 너무나 어립니다. 미숙해요. 그 상태를 오랫동안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도움이 필요하고요. 많은 걸 학습해야 해요.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듭니다. 그럼 뭐가 필요합니까? 배움을 즐겁게 하는 것이 필요하겠죠. 재미있다, 하고 싶다 같은 동기를 만들어 내야 해요. 그것이 호기심입니다.”


호기심에서 비롯한 배움이 생존과 직결되던 진화적 특성이 인간에게는 있었던 겁니다. 또한 인간은 큰 집단을 이루고 살면서 서로 배웠습니다. 지식을 축적했습니다. 곧 ‘사회적 학습의 진화’입니다. “특히 호모 사피엔스에게 호기심은 종의 특성”이라는 장대익 교수님은 호기심을 가득 품고 살았던 찰스 다윈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다윈은 평생 ‘나는 학생이다’라는 말을 써 놓고 산 사람입니다. 심지어 『종의 기원』을 쓰기 위해 옆 동네 사육사, 육종사와 교류하기도 하고요. 죽기 2년 전까지 지렁이를 연구해서 책을 썼죠. 제가 다윈 같은 사람이면 죽기 2년 전에 지렁이 책 안 쓸 것 같아요.(웃음) 그러나 다윈은 했어요. 정말 궁금했던 거예요.”


다윈 이야기에서 압권은 따개비 연구입니다. 다윈은 따개비 연구를 8년 동안 했다고 합니다. 따개비 같은 작은 생물에 집중한 8년이라는 시간과 천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써낸 다윈의 집념, 그 엄청난 호기심. 정말 압도적입니다. 


인류의 역사에 ‘호기심 천국’이던 인물은 많습니다. 바버라 매클린톡을 볼까요. 옥수수 연구로 1983년 노벨 생리 의학상을 받은 미국의 유전학자입니다. 그의 옥수수 연구는 당시 전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유전학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연구는 무시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고 끝내 역사상 최초의 여성 단독 수상자가 됩니다. 

그리고 여기, 우리의 칼 세이건이 있습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던 이유는 인문적인, 역사적인 지식들이 녹아 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과학자였다고 생각해요.”


호기심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인간의 평균 수명은 100년 전만 해도 불과 30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평균 수명을 낮추는 요인이 영유아 사망임을 떠올리면 평균 수명과 호기심 사이의 관계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평균 수명의 증가, 이것은 달리 설명할 수가 없죠. 과학 기술의 발전, 의학의 발전 때문입니다. 천연두라든가 각종 전염병을 이제 극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류의 삶을 질적으로 바꾼 것은 결국 과학이라고 볼 수 있겠죠. 지구상에 인구가 70억에 이르는데요. 아마 외계인이 와서 지난 1000만 년 정도를 훑어본다고 하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지구를 완전히 덮고 있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50만 년 동안만 본다 하더라도 가장 생태적으로 성공한 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인류의 호기심은 과학이 되어 모든 삶의 조건을 변화시켰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혁명적 사상”으로서의 과학을 해 인류에 공헌한 것이죠. 갈릴레오,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튜링 등은 모두 훌륭한 과학자인 동시에 “지성사를 바꾼, 혁명적인 사상을 만들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또한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더욱 소중합니다.




과학은 어떻게 종교를 ‘이겼는가?’ ② 과학은 어떻게 최강의 지적 탐구가 되었는가?

“지금은 혜성을 보고 소원을 빌 수는 있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아요.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니까요. 전에는 그렇지 않았죠. 도대체 과학은 무슨 활동이기에 이런 일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과학은 근본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틀을 바꿨습니다. 과학이 무엇이기에 그런 일을 가능케 했는가,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려고 한 것이 ‘과학철학’입니다. 장대익 교수님은 어째서 종교 지식이나 신화, 철학 등 여타의 여러 지적 탐구 방식이 아니라 과학이 이토록 엄청난 성공을 거뒀는지 따져 보기 위해 서양철학사에서 과학철학이 발전하게 된 계기에 대해 시대를 넘나들며 살펴보았습니다. 처음 언급된 철학자는 '논리실증주의', '분석철학'으로 잘 알려진 비트겐슈타인입니다.


“비트겐슈타인 전까지는 말이죠. 너무나 많은 지적 혼란이 있는데 그 혼란의 원인이 말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의미가 없는 혹은 의미가 너무 혼란스러운 말을 썼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운동을 펼칩니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이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밝혀야 한다. 의미 있는 문장은 두 가지뿐인데 그 문장 자체로 참과 거짓이 결정되는 분석적 명제이거나 경험적으로 참과 거짓이 결정되는 종합적 명제다.’라고 한 것이죠. 신학이라든가 형이상학 등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은 모두 쓸모없는 것이라는 말이었어요. 이것이 당시 논리 실증주의가 갖고 있던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이어 등장하는 철학자는 베이컨입니다. 그는 귀납적 방법론을 말하죠. 삼단논법으로 알려진 연역법은 명제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만이 가능할 뿐 개별적인 사례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학이 과학 아닌 것들과 다른 것은 결과가 아니라 방법에 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칼 포퍼는 반증주의, 즉 과학은 반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죠. 장대익 교수님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살피고 “과학이 위대한 이유는 열려있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정된 것은 없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더 나은 이론을 연구합니다. 합리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철학을 고민합니다. 지금의 이론은 뒤집힐 수 있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과학의 역사를 좀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토마스 쿤은 포퍼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실제 과학은 패러다임에 기초해 활동한다고 말이지요. 우리가 지금 수학 문제를 푼다고 가정해 보면 어떨까요?


“수학 문제집 끝에 가면 연습 문제가 나옵니다. 어려운 문제를 푸는데 안 풀려요. 결국 답을 틀렸어요. 그때 여러분은 문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나요?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할까,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과학이란 연습 문제를 푸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문제에 부딪히면 처음부터 이론을 의심하는 게 아니고 내가 잘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게 쿤이 이야기했던 아주 혁명적인 아이디어입니다. 

과학이란 어느 시대에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해당 이론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위기가 와요. 그때 대안적 패러다임이 등장해 지금 문제가 되는 그 문제를 아주 인상 깊게 풀어야 해요. 그러면 ‘신예들이 문제를 푸는 것을 보니 능력이 있구나.’ 하면서 그들에게 쏠립니다. 이 쏠리는 현상을 바로 과학 혁명이라고 말해요. 과학은 끊임없이 개조를 한다는 것이죠. 물론 이전의 것을 바로 버리지는 않습니다. 실제 바로 버리는 것이 좋지도 않아요. 실수의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쿤의 통찰은 과학을 상대주의로 끌고 가는 게 아니라 과학 활동이 굉장히 축적적인 활동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과학에는 특별한 방법론이 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과학만이 갖는 특별한 방법론, 과학의 절차가 있다는 말인데요. 이것은 다른 지식이 가지고 있지 않은 과학만의 특징이어서 종교, 예술 지식을 떠올리면 과학의 특별한 방법론이 어떤 것인지 좀 더 쉽게 이해가 됩니다. 경험과의 대조를 통해 자기만의 방법론을 구축한 과학, 그 방법론이 놀랍도록 성공했기 때문에 인류가 무지를 극복하고, 두려움이 과학에 자리를 내어 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장대익 교수님은 그런 이유로 “과학에 너무나 인식적 특권을 주고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적어도 어느 정도는 다른 지식에 비해 인식적 특권을 가질만한 자격이 있다.”라는 생각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과학은 어떻게 종교를 ‘이겼는가?’ ③ 과학과 종교의 만남

“중세, 근대로 넘어오면서 과학은 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일종의 ‘분가’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과학 혁명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 뉴턴이라고 볼 수 있겠고요. 이 ‘분가’가 바로 두려움을 이기는 지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살아 있습니다. 새로 집을 차렸는데 여전히 옛집이 있는 거죠. 뭔가 만남이 필요한데요. 어색할 수도 있고요, 화해할 수도 있고, 완전히 등을 돌릴 수도 있겠죠.”


종교에 대한 과학의 첫 번째 입장은 완전히 등을 돌리는 ‘과학적 무신론’입니다. 버트런드 러셀, 리처드 도킨스, 칼 세이건 등이 이에 해당하는 인물들입니다. 그중 칼 세이건은 “조금 복잡한 사람”이라는 것이 장대익 교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모두 더 이상 종교는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들인데요. 저는 이런 비유를 합니다. 바람을 세게 불어서 사람의 외투를 벗기려고 하는 것과 햇볕으로 따뜻하게 해서 외투를 벗기려고 하는 방법이 있다면 리처드 도킨스는 바람으로 외투를 벗기는 스타일이고요. 칼 세이건은 따뜻하게 해서 외투를 벗게 하는 스타일입니다. 칼 세이건은 따뜻하고, 도킨스는 전투적이에요. 어쨌든 모두 무신론자입니다.”


두 번째 입장은 ‘분리론’입니다. 과학은 ‘어떻게’를 묻지만 종교는 ‘왜’를 묻는다, 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영역을 나누자는 의미입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가 이와 비슷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비중첩 교권역(non-overlapping magisteria)’, 즉 예술이나 문학이 과학과 충돌하지 않듯 종교와 과학 또한 각자의 영역을 지켜야 한다는 것인데요. 그러나 장대익 교수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종교도 세상의 사실(fact)에 대해 이야기하고, 과학도 가치와 맞닿은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충돌하고 서로 경쟁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조금 부정적으로 말씀드렸지만요. 예를 들면 빅뱅 우주론을 유신론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이런 것에 해당할 텐데요.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종교가 이야기하는 것 아니냐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빅뱅 이전에 뭐가 있었는지 다 아시잖아요. H.O.T가 있었으니까요.(웃음) 이는 종교 교리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가설이다, 종교도 열려있다는 입장이에요. 어떻게 보면 멋진 입장인데 하지만 일관되게 유지하기가 어려운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입장은 ‘조화론’입니다. 한 사례가 등장하는데요. 서울대 이상묵 교수님 이야기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척추를 크게 다쳐 몸에 마비가 온 이상묵 교수님. 오래 병원에 누워있는 동안 많은 방문객이 교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이 몇몇 방문객에게 들은 말은 “하나님은 견딜 만큼의 시련만 주신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였습니다. 장대익 교수님은 “이것이 종교의 기가 막힌 셀링 포인트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종교가 주는 위로와 영향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이러한 부분이 지식의 세계에서 종교가 생존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른바 ‘가치 독점’입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의미를 주지 못한다. 네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감성을 건드리지 못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과학이 주는 경이감, 과학 지식과 사유가 만나는 지점을 떠올리면 종교가 ‘독점’하고 있는 가치의 문이 스르르 열리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과학이 그동안 종교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했던 어떤 것에 답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야 한다.”라는 게 장대익 교수님의 말입니다. 종교가 잘 해 온, 이 ‘셀링 포인트’에서 과학은 이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과학이 직면한 엄청난 도전”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종교의 미래는 무엇일까요.


“사실의 영역에서는 종교의 목소리가 더 이상 가치 있는 목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철 지난 목소리입니다. 그것에 매달려서 그 이야기대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순간 고대에 사는 셈이 됩니다. 우리는 엄청나게 새로운 지식을 얻었습니다. 아주 신빙성 있는 지식을 얻었어요. 과학이 사실의 영역을 다 차지했거든요. 어떻게 보면 종교가 위태로운 겁니다. 사실은 과학이 가져가더라도 가치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칼 세이건,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한 지금의 과학적 세계관을 유지하는 커뮤니케이터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가치입니다. 칼 세이건이 위대한 것은 그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쩐지 종교도 위태로워 보입니다. 




과학은 어떻게 종교를 ‘이겼는가?’ ④ 그런데 왜 우리는 과학을 즐기지 못하는가?

“과학, OECD 국가 중 4등이에요. 수학은 6등이에요. 그런데 수학을 왜 해야 하는지, 재미있는지, 나중에 뭔가 가치가 있을 것 같은지, 알고 있을까요? 우리는 하루 10시간 공부해서 80점을 받는데요, 스웨덴 아이들은 1시간 공부해서 50점을 받아요. 무엇이 더 훌륭합니까. 알 수 없는 겁니다.”


호기심이 만들어 낸 과학이지만 우리 환경에서 과학은 더 이상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익혀야 하는 기술 쪽에 가깝습니다. 학생들이 과학과 수학 분야 국제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지만 결코 과학을 즐기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현실이죠. “내적 동기가 바닥”입니다. 과학에서 호기심과 즐거움, 가치와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장대익 교수님의 ‘문턱 증후군’에 대한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입시 모드가 발동하면서 호기심은 억눌립니다. 소설을 읽으면 말리잖아요. 고등학교가 되면 학생들도 알아서 호기심을 억누릅니다. 그렇다고 대학을 가면 호기심이 폭발할까요? 아니죠. 호기심이라는 것은 단계가 있어요. 암흑기를 거쳤기 때문에 바로 튀어나올 수 없습니다. 게다가 대학 교육이 호기심을 키워 주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나 과학에 대한 로망은 계속 있어요. 배운 적이 없으니까 모를 뿐이에요. 자기 분열적 상황입니다.(웃음)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책을 안 읽잖아요. 그러다가 대학에서 들어오는데요. 정말 힘들게 대학에 들어오는데, 그전까지 모든 걸 다 쏟았기 때문에 문턱을 넘자마자 힘이 빠집니다.”


장대익 교수님은 과학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과학에 질린 상태가 된 학생을 만납니다. 이미 지쳐 버린, 번 아웃(burn out) 상태의 학생들이 모여 있는 학교. 이런 상황에서 과학이 즐거운 것이 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시급하게 교육이 변화해야 한다고 강하게 말하며 장대익 교수는 강연을 마쳤습니다. 



장대익 교수님의 강연이 끝나고, 이명현 박사님은 강연에서 다룬 과학과 종교에 관한 칼 세이건 스타일 묘사를 “정확하게 짚어 낸 것 같다.”라고 말하며 공감했습니다.


“칼 세이건의 태도는 굉장히 분명해요. 그동안 있었던 우리들의 문화유산으로서의 종교를 생각하자고 하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과학의 시대라는 거죠. 어떻게 과학을 통해 새로운 가치와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가를 명확하게 제시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칼 세이건이 마지막에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 소중한 지구를 지켜나가자.’고요. 『에필로그』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은 말하자면 칼 세이건의 유서 같은 책이에요. 거기에 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종교에 귀의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명확한 태도를 취하고 있어요. 앤 드루얀이 한국에 오셨을 때도 직접 물어봤는데요. 쓰여 있는 대로 명확하게 무신론의 태도를 끝까지 취하셨고, 다만 칼 세이건은 인간의 힘으로 몇 천 년 동안 해 온 종교적인 마음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고 해요.”


과학이라는 안경이 세상을 이전보다 선명하게 밝혔습니다. 인류는 세상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과학 이전의 시기부터 생명력을 이어 온 종교는 조금 고민하는 모습입니다. 종교는 이제 과학에게 자리를 내어 줘야 한다는 ‘무신론’, 종교가 할 수 있는 독보적인 영역이 있다는 ‘분리론’, 과학과 종교가 융합해야 한다는 ‘조화론’. 여러분은 어떤 입장입니까? ‘칼 세이건 살롱 2016’, 이번에도 과학의 여러 면모를 깊이 사유하는 멋진 숙제를 안고 갑니다. 




질의응답

호기심과 즐거움을 잃은 과학이라고 하지만 ‘칼 세이건 살롱 2016’은 달랐습니다. 다큐 속 이야기부터 장대익 교수님의 강연에 관해 추가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질문을 몇 개 선별해 아래에 소개합니다. 


어린 시절, 혜성은 핼리 혜성 하나뿐인 줄 알았지만 시간이 흘러 우주에 대해 많은 것이 밝혀졌습니다. 문득 어렸을 때 혜성이 지구에 생명의 씨앗을 가져다준다고 했던 기억이 있는데 얼마나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명현(이하 ‘이’): 근거가 꽤 있어요. 지구에서 생명이 생기기 힘든 것이 원자부터 시작하는 게 지구 환경에서는 어렵거든요. 우주 공간 속에서 이미 분자 상태로 오거나 분자를 만들기 위한 기초적인, 가령 아미노산 같은 것들이 만들어져서 지구로 오면 달라요. 분자들을 결합하는 것은 지구가 잘합니다. 바다가 있으니 이동도 쉽고요. 그런 의미에서 외부 유입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요. 최근에 보면 충돌할 때 물을 공급한 흔적에 관한 간접 증거들도 나오고 있어요. 또 혜성이나 소행성 같은 데서 많은 유기 화합물들이 실제 발견되고 있거든요. 거기서 만들어진 것들이 지구에 와서 지구에 적합한 생명체로 합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관측도 그렇지만 실험실에서도 합성 작업을 하고 있어서요. 상당히 신빙성 있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론입니다. 


빅뱅 이전에 H.O.T가 있었다고 하셨는데 과학이 아직 밝히지 못한 빅뱅 이전에 대한 장대익 교수님의 더 자세한 의견이 궁금합니다.

: 먼저 설명하자면 25년 전만 하더라도 빅뱅 이전이라는 말이 멍청한 말이었어요. 우주라는 것은 말 그대로 ‘universe’ 아닙니까. 그냥 우주란 하나뿐인 거예요. 그에 대해 ‘우주 바깥’이라는 질문, ‘우주 이전’이라는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 거거든요. 유일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다중 우주(multiverse)’라는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했어요. 그렇다면 빅뱅 이전, 우주 바깥도 자연스럽게 성립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서 논의가 있었고요. 거기에 대해서는 모델들이 많이 있어요. 충돌을 해서 지금의 우주가 생겼다고 한다면 빅뱅 이전은 다른 우주들이 충돌하는 것이죠. 그런 식의 양자 역학적인 우주 기원론도 있고요. 여러 논문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장대익(이하 ‘장’): 빅뱅 이전에 H.O.T가 있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냥 우스개는 아니고 뼈가 있는 말이에요. 빅뱅 이전을 과학이 설명하지 못한다고 종교가 설명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종교는 설명하려는 시도조차 안 하죠. 과학이 어느 선까지 밝혀내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 자체는 과학이 자신의 한계와 현재 수준을 인정하는 거거든요. 거기에 종교가 쓱 들어와서 그것을 종교가 설명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 우리는 속기가 쉬워요. 사실은 거기에서 설명이 일어나는 게 아니죠. 그냥 숟가락을 얹은 거죠. H.O.T가 있었다고 희화화하는 건 의도적인 거예요. 빅뱅 이전을 종교가 설명하고 있다고 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겁니다. 


태양계 은하 등이 대부분 볼록 렌즈 형태인데 왜 오르트 구름은 공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나요? 

: 얀 오르트라는 분이 많은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오르트 구름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냈느냐 하면요. 혜성 궤도를 연구했더니 가까이는 76년짜리 핼리 혜성도 있지만 장주기 혜성이라고 해서 3만 년짜리도 굉장히 많았던 거예요. 그런데 이 3만 년짜리 주기가 온 하늘에서 다 오는 거죠. 그래서 모든 방향에서 오는 3만 년 주기의 혜성들의 궤도를 계산한 거예요. 계산을 해 보니까 태양계 중심으로부터 1광년 정도 떨어진, 빛으로 1년 가는 거리에 얼음 알갱이들이 공처럼 싸고 있어야겠다고 추론을 한 거죠. 그래서 오르트 구름이라는 게 생긴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도 패러다임인가요? 만약 패러다임이라면 틀릴 수도 있는 건가요? 

장: 그렇죠. 과학의 역사를 공부하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어요. 과학이 당대 최고의 신빙성 있는 지식이 되었다고 말씀드렸지만 400~500년에 걸쳐 축적된 평가인 것이죠. 그런데 역사를 공부해 보면 약간 회의가 들어요. 뉴턴도 그렇게 훌륭했지만 아인슈타인한테 뒤집혔잖아요. 역사적인 귀납법을 쓰면 당연히 다음에 큰 패러다임 전환이 있겠죠. 그렇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과 현재의 과학 지식을 의심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패러다임 안에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해요. 우리가 진리를 탐구하는 게 아니라 가장 신빙성 있는 지식을 탐구하는 거거든요. 저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깨달음을 사회적 각성,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만들 수 있는 과학적 혹은 사회적 방법론은 없을까요?

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과학이 이 부분을 건드리지 못해 왔고 안 하려고 하기 때문에 과학과 점점 멀어지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질문을 드려 볼게요. 어쩔 수 없이 6개월 간 실직 상태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게 어느 정도의 고통일까요?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했을 때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한편 아주 가난한 동네가 있고, 실직자가 많은 동네가 있다면 어느 동네가 더 황폐할까요? 실직자가 많은 동네가 훨씬 더 황폐했어요. 일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삶의 만족감과 고통을 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원천이거든요. 이런 내용을 알고 일자리 문제,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과 모르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달라요. 그러니까 정치인도 공부를 해야 해요. 인간에 대한 지식 중에서 새로운 지식이 어디서 오는지 한 번 보세요. 모두 과학에서 오거든요. 이런 것을 받아들이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죠. 인간이 만드는 문제와 사회 문제에 대한 접근을 다른 식으로 할 수 있어요. 과학이 가치를 그대로 만들어 주진 않지만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내려면 사실과 지식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인간과 이 사회에 대한 지식이 업데이트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업데이트는 과학이 해 줘요. 결국 과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그 해결책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상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아주 창의적인 해결책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과학적 탐구에서 온다고 생각해요. 


*<칼 세이건 살롱 2016> 5강 ‘빛의 뒤에서(Hiding in the Light)’는 10월 28일 금요일 7시에 ‘벙커1’에서 진행됩니다.



글 : 신연선

사진 : (주)사이언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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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전쟁』 [도서정보]


『통섭』 [도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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