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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속에 흐르는 할아버지의 굶주림: 1930년의 상흔이 전하는 경고 본문
후성 유전학의 놀라운 성과들을 다룬 「강양구의 과학의 민낯」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오드리 헵번이 겪었던 기근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흥미롭게 읽으신 독자라면 당신의 할아버지가 겪은 일이 손자인 당신의 몸과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하지 않으실까요? 함께 읽어 보시죠.

앞 세대가 겪은 기근, 빈곤, 트라우마가 자녀를 넘어 손자녀 세대까지 전달될 수 있을까?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1920년생이다.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나서 10대 후반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전라남도 영암에서 함경남도 함흥 비료 공장(조선 질소 비료 주식 회사 흥남 공장)에 취업해야 할 정도로 팍팍한 살림살이였다. 당연히 유년기나 청소년기를 풍족하게 보냈을 리가 없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할아버지께서 삶의 초년기에 겪었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고난은 나에게 무슨 영향으로 남았을까? 이런 질문은 망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의 몸에 새겨진 삶의 흔적이 세대를 건너뛰어 손자인 나한테도 충분히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놀랄 만한 증거가 축적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 최북단 지역 노르보텐(Norrbotten)에 남은 방대한 데이터가 발단이었다. 노르보텐은 북극권에 근접한 척박한 땅으로 외부 세계와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세기부터 노르보텐에는 기근과 풍작이 번갈아 이어졌다. 1800년 기근, 1801년 풍작, 1812년 기근, 1822년 풍작, 1828년 풍작, 1836년 기근 등.
19세기 유럽 최북단 지역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었던 데에는 루터 교회의 역할이 컸다. 이 교회는 16세기부터 태생, 사망, 결혼은 물론이고 그해의 수확량과 식량 가격까지 상세히 기록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곳의 작은 마을 외베르칼릭스(Överkalix)도 마찬가지였다. 외베르칼릭스 교회에는 방대한 데이터가 잠들어 있었다.
라르스 올로프 뷔그렌(Lars Olov Bygren)과 군나르 카티(Gunnar Kaati) 등은 교회의 방대한 데이터를 보면서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링크) ‘19세기 굶주림과 풍족함을 번갈아 겪었던 외베르칼릭스 아이의 경험은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줬을까?’ 이들은 1905년 외베르칼릭스에서 태어난 아이 99명의 삶을 추적하면서,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가 겪은 풍작과 기근의 관계를 따졌다.
결과는 상식 밖이었다. 사춘기 직전(9~12세) 극심한 기근을 겪었던 할아버지의 손자와 반대로 유례없는 풍작으로 풍요를 누렸던 할아버지의 손자를 비교 분석했다. 통계 모형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부 데이터에서 두 집단 사이 평균 수명이 무려 32년이나 벌어지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특히 풍작을 겪은 할아버지의 손자는 당뇨병 사망 확률이 비교군보다 4배나 높았다. (“32년”의 수명 차이는 2001년 초기 연구의 소규모 표본 내에서 집단 간의 극단적 격차를 분석한 결과로, 이후 대규모 추적 조사에서는 사망 위험률(Hazard Ratio)을 중심으로 연구가 정교화되었다. 이후 BBC 다큐멘터리 등에서 「당신 유전자 속의 유령(The Ghost in Your Genes)」(2005년 11월 3일) 등에서 “32년”이라는 숫자가 상징적으로 언급되었다.)
나중에는 당뇨병에 더해서 심혈관 질환 사망률도 비슷한 관계를 보인다는 사실이 추가로 확인되었다(2002년). (링크) 할아버지가 사춘기 직전에 겪은 ‘풍요’가 오히려 손자에게는 32년의 수명을 앗아 가고, 당뇨병과 심혈관 질환의 유병률을 높이는 ‘생물학적 저주’가 되었다. 도대체 외베르칼릭스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공포의 전이: 정자에 새겨진 화학적 경고문
만 9세부터 12세까지는 폭발적인 성장을 앞둔 느린 성장기(slow growth period, SGP)이다. 바로 이 느린 성장기에 정자 형성의 토대가 되는 생식 세포의 특징이 설정된다. 이 과정에서 환경이 갑작스럽게 변하면 정자와 같은 생식 세포에 그 흔적이 각인된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앞의 연재에서 살펴본 특정 유전자 스위치를 끄는 ‘DNA 메틸화(-CH3)’이다.
할아버지가 만 9세부터 12세까지 갑작스러운 풍작으로 과잉 영양 섭취를 하면 정자에 그 흔적이 각인된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정자에 새겨진 흔적은 아들을 경유해서 손자에게 생식 세포를 통해서 전달된다. 이 과정에서 정자의 후성 유전학적 변화와 수정 시 정자에 섞여 들어가는 유전자로 직접 기능하지 않는 마이크로 RNA(microRNA, miRNA) 등 다양한 요인이 개입한다.
그 결과, 할아버지가 만 9~12세 때 겪었던 풍요로운 식탁의 기억이 수십 년 뒤 손자의 췌장에서 인슐린 스위치를 조절하는 데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나중에 외베르칼릭스 연구에 합류한 마르쿠스 펨브레이(Marcus Pembrey) 등은 이 과정을 ‘세대 간 후성 유전(transgenerational epigenetics)’으로 규정했다. (링크)
할아버지의 몸에 영향을 준 환경 요인이 세대를 건너 손자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면 이런 실험도 있다. 2013년 12월 브라이언 디아스(Brian Dias)와 케리 레슬러(Kerry Ressler)는 수컷 생쥐를 놓고서 진행한 고약한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온라인 공개) 수컷 생쥐에게 벚꽃 향기를 흉내 낼 때 사용하는 아세토페논(acetophenone)을 맡게 하면서 전기 충격을 줬다. (링크)
이 불쌍한 수컷 생쥐는 벚꽃 향기만 맡으면 공포를 느꼈다. 그러고 나서 이 생쥐가 낳은 수컷 자식(F1)과 수컷 손자(F2) 세대를 조사했다. 이들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벚꽃 향기를 맡거나 전기 충격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자식, 손자 쥐들 모두 벚꽃 향기만 맡으면 공포 반응을 보이면서 몸을 떨었다.
디아스와 레슬러 등이 벚꽃 향기 공포를 직접 학습한 아비 생쥐의 정자를 분석했다. 그랬더니 벚꽃 향기를 감지하는 후각 수용체 유전자의 DNA 메틸화 수준이 낮아져 있었다. (6-1 편 참조) 공포라는 환경 자극이 아비 생쥐의 정자에 각인되었고, 이것이 자식과 손자에게 세대 간 후성 유전으로 전달된 것이다.

세대 간 후성 유전: 시간을 여행하는 생물학적 메신저
여기까지 읽고서 당혹스러운 독자가 분명히 있을 테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 부활?’
진화의 역사에서 조롱거리가 된 과학자를 딱 한 명만 꼽으라면 프랑스의 과학자 장바티스트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 1744~1829년)가 있다. 그는 기린의 목이 긴 이유를 놓고서, 목이 짧은 조상 기린이 높은 나뭇잎을 먹고자 목을 계속 늘렸고, 이 과정에서 발달한 형질(획득 형질)이 자손에게 유전된 탓이라고 설명했다.
할아버지의 경험(만 9~12세 때의 풍요)이 대를 이어 손자에게 영향을 준다는 외베르칼릭스 연구나 아비 생쥐의 스트레스 경험이 대를 이어 자식, 손자에게도 각인된다는 결과는 곧바로 라마르크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곧바로 기성 진화학계에서 거센 반발이 있었다. 명백한 실험 결과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 대체로 반응은 폄하로 수렴되었다.
후성 유전적 변화는 몇 세대만 지나면 사라지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기에 거시적인 진화의 관점에서는 결정적 변수가 아니라는 식이다. 하지만 후성 유전학자는 설사 라마르크를 떠올리게 하더라도 ‘환경 자극을 통한 메틸화나 아세틸화 같은 화학 변형이 진화에 영향을 주는’ 분자 생물학적 실체는 실존하며, 되레 이것이 진화의 가속 페달일 수도 있다고 반박한다.
세대 간 후성 유전을 놓고서는 여전히 학계에서 논쟁이 진행 중이다. (예를 들어, 디아스와 레슬러 연구는 재현 연구에서 엇갈린 결과가 나와서 계속해서 논쟁 중이다.) 하지만 앞으로 연구 성과가 하나둘 쌓일수록 ‘유전이냐, 환경이나?’ 같은 이분법을 맹신하는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 가능성이 크다. 후성 유전학의 연구 성과는 라마르크의 유령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생명 현상의 복잡함이 현대 과학을 통해서 재발견된 것이다.
국내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미 2005년에 에바 야블론카(Eva Jablonka, 1952~ )와 마리온 램(Marion J. Lamb, 1939~2021)이 『Evolution in Four Dimensions』를 통해서 현재 진화 생물학의 주류인 ‘유전자 중심주의’를 비판하며 다층적인 진화의 경로를 제시한 적이 있다. (2014년 개정 증보판이 나왔다.)
이들은 그간 도킨스 같은 진화학자가 강조해 온 ‘유전적 차원(genetic dimension)’ 외에도 우리가 이번에 주목한 ‘후성 유전적 차원(epigenetic dimension)’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들은 동물이 학습이나 모방을 통해 습득한 행동 양식이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과정에 방점을 찍은 ‘행동적 차원(behavioral dimension)’도 덧붙인다.
결정적으로, 인간이 언어와 기호 등을 포괄하는 문화를 통해 세대를 넘어 정보를 전달하는 ‘상징적 차원(symbolic dimension)’도 진화의 한 경로로 볼 것을 제안한다. DNA 외에도 세포 상태의 기억, 학습된 습성, 기호적 소통 모두가 정보를 다음 세대로 넘기는 경로이고, 이 네 가지가 얽힌 결과물이 바로 진화의 온전한 실체라는 선언이다.
진화는 설계도의 복사가 아니라, 삶의 양식 전체가 다음 세대로 흐르는 거대한 강물이다.

우리는 서로의 환경이며, 서로의 역사다!
복잡한 과학 논쟁을 과학자의 몫으로 남겨두면 후성 유전학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명확하다. 앞에서 잇따라 살펴봤듯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환경 요인은 그간 생각해 온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전쟁, 테러, 기근 같은 극단적인 역사-사회 요인은 그 상흔이 또렷하기에 그것이 남긴 후유증을 찾기도 쉬웠다.
여기에 더해서 스트레스 자극도 세대를 넘어 전달된다는 사실이 확인된 만큼,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겪는 수많은 환경 요인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 몸에 흔적을 남기고 그것이 때로는 나를 넘어서 나의 자녀, 손주까지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직장 내 괴롭힘부터 환경 오염까지 그렇게 영향을 주는 요인을 열거하자면 한둘이 아니다.
특히 태아와 영유아기 아이의 건강, (아동 학대 감시를 포함한) 아동기 가정 환경, 사춘기 이전과 이후를 포함한 10대의 건강 등에 지금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하다. 이들을 잘 보살피는 일은 바로 다음 세대뿐만 아니라, 그다음, 또 그다음 세대의 건강까지 신경 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할아버지 이야기. 할아버지가 열 살(만 9~12세)이던 1930년은 일제의 산미 증식 계획의 부작용과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농가 재정이 파탄이 났던 때이다. 풍년으로 쌀 수확량이 나쁘지 않았으나, 대공황으로 쌀값이 폭락하면서 고정비(비료 대금, 소작료 등)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곤궁한 상태로 빠져든 농가가 속출했다.
오죽하면, 할아버지가 살던 호남 평야의 중심인 전라남도 영암, 나주, 함평 등지에서 쌀을 생산하고도 농민 다수가 만주에서 들여온 조와 수수로 연명하거나 그것마저도 없어서 굶주리는 일이 속출했다. “풍년이 들었어도 농촌에는 비참한 절규”뿐인 상황에서 굶주렸던 할아버지는 철이 들자마자 먼 타지로 돈을 벌러 갈 수밖에 없었다. (링크)
그때 할아버지의 굶주렸던 경험은 나의 몸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그리고 지금 나의 경험은 내 다음, 그다음 세대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봐야 할 질문이다.

강양구
서울시 미디어 재단 TBS 과학 전문 기자이자 지식 큐레이터. 연세 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참여연대 과학 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시민 과학 센터) 결성에 참여했다. 《프레시안》에서 과학 환경 담당 기자로 일했고, 대한 적십자사 혈액 비리, 황우석 사태, 메르스 사태, 코로나19 팬데믹 등에 대한 기사를 썼다. 특히 황우석 사태 보도로 앰네스티 언론상, 녹색 언론인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과학의 품격』, 『강양구의 강한 과학』, 『세 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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